이어진 나병의 규례이다.
9절. 사람에게 나병이 들었거든 ...
나병에 걸린 사람.
이 사람은 반드시 제사장에게로 데려가야 했다.
피부에 나 있기로소니, 숨길 수가 없는 병이었다.
이 나병환자를 제사장은 꼼꼼히 진찰한다.
그 때에 이러한 증상이 있다면 7일 격리의 시간을 거치지 않고 바로 ‘부정한 자’가 된다.
왜냐하면 오래된 나병이기 때문이다. (11)
- 피부에 흰 점이 돋고
- 털이 희어지고
- 생살이 생겼으면 (10)
이러한 나병은 오래 가두어 두지 않는다.
나병이 그 피부에 크게 발생했는데, 환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퍼졌으면 (12)
진찰을 받은 후에, 나병이 전신에 퍼졌으면 그 환자를 ‘정하다’ 라고 한다.
13절. 그 환자를 정하다 할지니 다 희어진 자 인즉 정하거니와
모든 피부가 전부, 전신에 퍼졌으면 ‘정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 다시 생살이 보이면 ‘부정한 자’가 된다.
14절. 아무 때든지 그에게 생살이 보이면 그는 부정한즉
15절. 제사장이 생살을 진찰하고 그를 부정하다 할지니 그 생살은 부정한 것인즉 이는 나병이며
다시 그 생살마저 ‘희어지게 되면’ 그럼 다시 제사장에게로 간 후에
제사장은 진찰하여 ‘정하다’ 라고 하게된다.
17장. 제사장은 그를 진찰하여서 그 환부가 희어졌으면 환자를 정하다 할지니 그는 정하니라
이어지는 나병환자에 대한 규례이다.
규례가 이렇게 자세히 몇장에 걸쳐 나오는 것을 보아하니, 당시 나병 환자가 많았던 모양이다.
근동사회에서 나병은 죽음을 연상시켰다고 한다.
외양이나 냄새가 시체의 썩어가는 피부와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 전염되는 것은 아니지만, 비늘처럼 벗겨지는 피부를 보며 혐오감을 주기에 충분할 듯 하다.
이러한 나병에 걸린자.. 하나님은 어떻게 판결을 내리시는가?
오늘 나병환자의 규례에 보면 조금 독특한? 구절이 보인다.
앞서 13장에서 계속하여 ‘부정하다’ 했던 나병이,
오늘 이어지는 13장의 본문에서는 ‘정하다’ 라고 하는 것이다.
나병환자가 정하여진다...
나병이 나음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라, 100% 나병환자는 정하다는 것이다.
13절. 그가 진찰할 것이요 나병이 과연 그의 전신에 퍼졌으면 그 환자를 정하다 할지니, 다 희어진 자인즉 정하거니와
이 기준은 여러번 반복되어 나타난다.
나병이 완전히 퍼진 자에게 ‘생살’이 보이면 그는 다시 ‘부정한 자’가 된다.
왜냐하면, 100% 나병이 아니기 때문이다.
14절. 아무 때에든지 그에게 생살이 보이면 그는 부정한즉
그러다가 다시 그 생살이 나병이 되면, 100% 나병이 되기 때문에 ‘정한 자’가 된다.
17절. 제사장은 그를 진찰하여서 그 환부가 희어졌으면 환자를 정하다 할지니 그는 ‘정하니라’
무슨 규칙인가?
간단하게 보면, 나병이 전혀 없거나 전체 all 나병이거나. 그럴 경우에 ‘정한 자’가 되고
부분 부분 나병인 자는 여지없이 ‘부정한 자’가 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규례였다.
나는 여기까지 묵상을 하게 되면서, 이것이 무슨 법칙일까 생각하게 되었다.
100% 나병이거나, 100% 나병이 아니거나 둘중에 하나는 ‘정하다’
그러나 ‘약간 나병’은 ‘부정하다’ 라는 규례라면..
이것은 병 자체가 문제가 있어서 라기보다는 퍼센테이지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퍼센테이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신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할 말이 없지만, 연이어 생각할 때 ‘거듭난 자’의 신약백성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볼 때에는 아하 그렇고니 하게 된다.
하나님은 100%를 받으시는 분이라는 것 말이다.
요한복음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요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중간이 없다는 말이다.
따르든지 말든지, 거듭나든지 말든지가 없다.
또 이런 말씀이 있다.
요 3: 3 ...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철저히 ‘거듭남’이다.
죽고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도 달리 말하면 중간이 없다는 말이다.
죽을 것 같다거나 태어난 것 같은 그런게 없다는 말이다.
계시록에도 이런 말씀이 있다.
계 14:4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던지 따라가는 자들이다.
어린양이 어디로.. 어디로 데려가든지 가는 자가 어린양에게 속한 자라고 한다.
자신이 어디로 갈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따라가는 자들이라고 한다면, 자기 자신이 없다는 말이다.
어린양을 100% 따를 때에만 가능한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계시다.
믿음은 반드시 움직임을 수반하는데,
50,60,70,80%로 포장된 무엇은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있다.
오직 100% 자신을 던지는 그 믿음만이, 이 땅에서 뿌리가 뽑혀 하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게 한다.
적당히, 세상나라와 하나님 나라를 섞어 양다리 걸치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는 것이 성경 내내 증언한 말씀인 것이다.
‘나는 100을 원한다.’
부정하든 정하든,
나병이 조금도 없어서 ‘정한 자’이든, 전체가 나병이 들어 ‘정한 자’이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을 인정할 때에, 100%. 전혀 건질 것이 하나도 없는 완전히 부패하여 썩어 버림받을 죄인인 것을 인정하는 자.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이제 그 100%의 죄인이 ‘의롭다’함을 얻은 것도 100% 예수의 의를 덧입어서 임을 믿는 자.
그러한 자는, 어린양의 음성을 듣고 어린양을 따라가는 100%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이 땅의 가치관에 묶인 This life의 삶이 아닌,
eternal life의 삶 말이다.
그리고 겨자씨와 같은 그것은,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나라의 열매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뒤돌아서면 텅 빈 바구니를 든 것 같이 허무한 때가 있었다.
아무리 사역을 열심히하고, 열심히 전도하고 해도 내 가슴에 텅 빈 것 같은 허무함에 몸서리 칠 때가 있었다.
열매가 무엇인가? 내 삶에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이렇게 허무에서 허무를 반복하다가. 결국 내 손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간간히 재미와 기쁨으로 순간의 만족의 포장을 벗겨보니, 무대 뒤에서의 초라한 삐에로의 모습과 같은 나를 발견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내 목적이 그리스도이다.
내 방향도 그리스도이다.
내 달려갈 길도 그리스도고, 달려갈 힘도 그리스도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며 살아가고, 그리스도로 만족한다.
그리고 내 삶에 부족하고 연약한 부분은 늘 있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다.
100을 던졌을 때의 은혜였던 것을 기억한다.
오늘도 나는 이 믿음이 필요하다.
그리스도가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는 100의 믿음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믿음
내가 그리스도를 끌고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드리는 믿음
그 때에 하나님은 나에게 ‘정하다’ ‘의롭다’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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