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d Testament/Leviticus

레위기26장_죄된 생명 안에는 황폐만 있을 뿐이다.

Abigail_아비가일 2021. 8. 27. 00:20

조금 끔찍한 말씀이 나온다.

사실은.

조금 끔찍한 것이 아니다. 아주 많이 끔찍하다.

 

27절. 너희가 이같이 될지라도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고 내게 대항할진대

29절. 너희가 아들의 살을 먹을 것이요 딸의 살을 먹을 것이며 ..

 

첫번째, 두번째 세 번째,네번째 징계를 내리더라도 듣지 않았을 경우.

다섯번째 징계가 바로 이것이었다.

 

-      아들과 딸의 살을 먹고

-      너희의 산당을 헐며 너희의 분향단을 부수고

-      너희의 시체들을 부서진 우상들 위에 던지고

..

 

이것은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니였다!

아들과 딸의 살을 먹을 정도면.. 얼마나 비참하고 비참하고 비참한 … 그러한 모습일까

얼마나 비참한 모습일까..

아비규환일 것이다.

자신의 아들과 딸을 알아보지 못하고, 배고픔에 오래 굶주려서.. 결국 자신의 배에서 나온 자녀를 먹어야 한다면.

이제 인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짐승의 삶만 남은 이들..

 

이들이 그토록 애지중지 했던 모든 분향단과 성소들이 파괴되었다.

허무 그 자체이다.

모든 것들이 무너졌다.


황폐 그 자체.

31절. 내가 너희의 성읍을 황폐하게 하고 너희의 성소들을 황량하게 할 것이요 …

 

황량하고 황폐한 불타버린 성읍이 눈에 보인다.

그 영화로웠던 것들이 모두 사라진…

32절. 그 땅을 황무하게 하리니 거기에 거주하는 너희의 원수들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놀랄 것이며..

 

원수가 놀랄 정도이다.

이 아름답고 찬란했던 영화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원수들마저 놀라는 황폐이다

33절. 내가 너희를 여러 민족 중에서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

 

황무와 황폐. 바로 이것이다.


황폐함.

황량함.

황무함..

 

그 찬란했던 영화가 다 사라지고, 어떻게 이렇게 되었나.

눈이 상하도록 울었던 선지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비참하게 그지 없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

사실 여러 번의 과정과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5번째 재앙에 이르러 결국 자신의 자녀의 살을 먹게 되기까지.. 이들에게 하나님께 청종하지 않고 대항하는 존재적인 마음이 있었다.


 

잠시 생각해본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어쩌다가 이렇게 비참한 꼴이 되었는지..

 

27절. 너희가 이같이 될지라도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고 내게 대항할진대

28절. 내가 진노로 너희에게 대항하되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칠 배나 더 징벌하리니..

 

하나님께 청종하지 않는 존재적 죄인의 모습.

아무리 갈고 닦아보아도.. 죄에 죄를 더할 수 밖에 없는 죄인 ..

본질상 하나님을 싫어하고 청종할 수 없고, 아무리 벌에 벌이 더하여 진다 할지라도 내 원함대로 내 뜻대로 내가 가고 싶은 길로 기어코 가야만 하는 이 지긋지긋한 죄성을 벗을 수 없는 죄인들 말이다.

스스로 죄인이기에 그렇다는 것을 모르고, 언제나 상황탓 환경탓하며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다른 죄를 짓는..

하나님을 바라지도 않고 찾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는 목이 곧은 백성..


바로 이런 자가 ‘나’이다.

하나님을 본질상 싫어하여 그분의 음성을 듣고 싶지 않고 청종하고 싶지 않고

내 원함대로 내 편할대로 나나나 하면서 상황과 조건에 나의 행복을 대가며..

아주 잠깐의 달콤한 만족을 위해.. 계속해서 끊임없이 달려갈 수 밖에 없는 바로 DNA상, 본질상 재앙으로 치닫는 인생…

 

아,

이것이 바로 인생이라면 얼마나 허무한가.

얼마나 비참한가.

 

이런 존재적인 절망 속에서

바로 복음이라는 꽃이 핀다는 것. 그것이 놀라운 것이다.


완전한 절망가운데,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에게 거저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시다.

 

완전히 부패하고 썩어 황폐하고 황량한 영혼 가운데에..

이전의 생명은 지워지고, 차원이 다른 완전히 새로운 생명이 주어진다.

그것은 바로 ‘예수 짜리의 생명’이다.

예수님의 생명 말이다..

 

이 생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싶고 청종하고 싶은 생명이다.

대항하고 싶은 모든 것이 눈녹듯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분의 임재가 있는 곳으로 스스로 찾아가는.. 순종하는 생명이다.

이 생명을 주신 것이다. 믿음으로 말이다.

이 생명을 예수님의 핏값을 치루고 선물해주셨다.


스스로 속지 말아야 할 것은, 죄된 생명에 무언가 걸어볼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다.

이 죄악된 생명에 뭐가 있을 것이다.. 희망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다시 살려볼 만하다 하는 생각.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주지 않으셨을텐데..

죄된 생명.. 죄된 생명…

 

바로 이 생명이 끝장나고 예수 생명이 주어져야만, 내가 나답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이다.

그 때부터가 진짜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