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d Testament/Leviticus

레위기4장_새로운 삶의 법도에 들어온 자

Abigail_아비가일 2021. 8. 25. 16:26

이어진 속죄제를 드리는 규례이다.
4장에서는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 ‘기름부음 받은 제사장’, ‘이스라엘 온 회중’, ‘ 족장’‘,’평민의 한 사람‘ 등의 경우에 각각 제사드리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오늘에 이어지는 5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속죄제의 규례를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여러 경우의 수에 대하여이다.
다음과 같은 상황이 생겼을 때에 하나님은 이것을 무엇이라고 보시며,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일까?

1, 누구든지 저주하는 소리를 듣고서도 증인이 되어 그가 본 것이나 알고있는 것을 알리지 않을 때
: 이것은 죄였다. 허물이 자신에게로 돌아간다 (1)

2. 부정한 것들 (부정한 들짐승의 사체나 부정한 가축의 사체나 부정한 곤충의 사체)를 만졌으면
: 부지중이라고 할지라도 그 몸이 더러워져서 허물이 있을 것이요 (2)

3. 부지중에 어떤 사람의 부정에 닿았는데 그 사람의 부정이 어떠한 부정이든지 그것을 깨달았을 때
: 허물이 있을 것이다 (3)

4. 입술로 맹세하여 악한 일이든지 선한 일이든지 악한일이든 선한 일이든지 하리라고 함부로 말하면 그 사람이 함부러 말하여 맹세한 것이 무엇이든지 그가 깨닫지 못하다가 그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 중 하나에 허물이 있을 때에는 아무 일에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 그 잘못으로 인해 여호와께 속죄제를 드리되 양 떼의 암컷 어린 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린다. 제사장은 그의 허물을 위하여 속죄할 수 있다. (4-6)



뒤 이어지는 것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하나님 앞에 속죄제물을 드리지 못할 경우를 말하고 있다.

1. 만일 그의 힘이 어린양을 바치는 데에 미치지 못하면 그가 지은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여호와께 가져가되 하나는 속죄제물로, 하나는 번제물을 삼아서 제사장으로 가져간다. (7-10)

2. 만일 그의 손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 비둘기 두 마리에도 미치지 못하면
: 그의 범죄로 말미암아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예물로 가져다가 속죄제물로 드린다.  (11)
제사장이 그의 허물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13)


출애굽 한 이스라엘을 생각해보자!
출애굽한지 얼마나 되었나? 이제 겨우 2년 남짓 되었을까?
10년이라면 강산이 바뀐다던데, 아직 이스라엘 광야생활에 적응 5년도 채 되지 않은 이 백성들에게 ‘새로운 법규’들이 주어진다.

이들에게 ‘십계명’이 주어졌고, 첫 번째 돌판과 두 번째 돌판이 주어졌다.
그리고 성막을 만든 후,
이들에게 ‘새 법’이 주어진다.

어떻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가?
놀랍게도 이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삶의 양식’이 주어진다.
이전의 가치관과는 차원이 다르고, 생각해 본적도 없는 ‘새 법규’였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죄’와 ‘거룩’에 대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았다.
이들에게는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애굽에서 좋다고 하면 좋은 것이었고, 애굽에서 안좋다하면 안좋은 것이었다.
애굽에서 누리던 것은 좋은 것이었고, 좋고말고를 떠나 살기 위해서는 그것과 함께 뒤섞여 있어야 했다. 그들은 구분하지 못했다.

그런데 ‘규례’라는 것이 주어진 것이다.
바로 무엇이 ‘옳고’ 무엇이 ‘옳지 않은지’ 그것의 기준이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출발하게 되었다.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해야 하는 새 삶이 되었다.

그리고 부정한 것과 접촉이 되었을 때에, 그것을 가지고 있어서는 살 수 없는..
새로운 삶이 되어져버렸다.

허물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부지중이라도 죄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죄와 허물이 있을 경우에는
그 어떤 경우라 할 지라도, 철저한 ‘댓가’를 치러야했다.
자신이 양을 바칠 수 없는 경우에는 고운 가루를 바쳐서라도 죄를 사함을 받아야 했다.

이것이 이들이 맞게된 새로운 생활양식이 되어진 것이다.



참 기준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는 차원이 다르다는 생각도 들었다.

말씀과, 죄와, 마음을 다루는 그러한 법.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러한 법도를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셨다.

어떤 이들은 대체, 왜 먹고살기도 어려운데 이 법을 지켜야 하느냐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처음 이 법을 대하는 사람들은 어색하고 뭔가 불편한 옷 같은 그런 과정을 지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잠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이 말씀이 생각이 났다.

‘죄’로부터 ‘마음’을 지켜야 하는 법..
세상사람들과는 전혀 사고체계가 다른 법. 죄를 지어서라도, 내가 손해가 되지 않으려면 마음이고 뭐고 서슴없이 올라가야 하는 세상의 방법과 전혀 다른 법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데
마음을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법..



마음에 ‘생명’이 없다면 죽는 것이라는 것을..
너 애굽에서 아무리 잘되면 뭐하니.
노예출신으로 애굽에서 잘나가면 뭐하니.
하루를 살아도 자유롭게 살아야지. 하루를 살아도 생명으로 살아야지.



몇 일 동안 여러 일과, 내 마음의 일을 겪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 세상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것에 새삼 깜짝 놀랐다.
아, 내가 이런 생각을 갖고 살다가 구원을 받았구나.
어느새 세상논리와 다른 법도로 살아가는 안전한 조치에 감사하면서도

다시 세상의 강한 손길, 메시지가 물밀 듯이 들어오려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처음에는 효율적이고 강해보이고 승리가 있는 것 같지만
그래서 솔깃하지만, 결국 이방법은 마음을 놓치게 된다.


마음 놓치면 전부를 놓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마음에 대해서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마음이 놓쳐지면 전부를 빼앗기는 것이다.
부지중에 범한 죄와 허물이라도 반드시 속죄제를 치러야할 만큼 철저하게.. 그렇게 마음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새로운 법도의 삶에 들어온 것
마음, 마음을 하나님 앞에 정결하고 투명하고 청결하게 지키는 것을 ‘생명’처럼 ‘목숨처럼’ 그렇게 여기는 이 삶이 가장 가장 안전하고 완전한 삶이다.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생명의 근원을 목숨처럼 지키는 것.

하나님과의 관계와 친밀함에 전부를 거는 삶.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에 전부를 거는 삶.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지만,

결국 완전한 승리의 길이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