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d Testament/Genesis

창세기37장_참 사랑

Abigail_아비가일 2021. 8. 18. 14:58

‘나도 사랑받고 싶어'

늘 요셉은 한 발치 멀리 떨어져 있었다.

형들이 강가에서 물놀이를 할 때에도
양을 칠 때에도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에도

요셉은 늘 혼자였다.

‘왜 형들은 내 곁에 오지 않을까?
나한테 한마디. 같이 먹자고 할 수도 있을텐데.'

요셉은 아직 어렸다.
요셉에 대한 형들 안의 불타는 시기심을 아직 이해할 수 없었다.
4절..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차마 말할 수 없는 시기심.
그러나 감출 수 없는 시기심.

그저 운명인가보다.. 형들 사이에 나는 원래 이런 존재인가보다.
하면서도
가슴 한 켠은 늘 서글펐다.

‘아니. 형들은 나를 사랑해. 우리는 가족이잖아'

또 한 켠으로는
믿고 싶은 본심...



‘쟤 완전 바보 아냐? 저렇게 모를까. 우리 아빠가 자기 아빠인줄만 아나봐’

정작 풍족한 사랑을 받는 사람은 . 그 사랑을 잘 모를 때가 있다.
아니면, 모든 사람이 사랑의 결핍을 느낄 수도.

아담의 죄를 그대로 이어받은 인생들의 본성은.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은 망각하고, 자신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에 불처럼 반응한다. 마치 휘발유를 만난 불처럼.


어느날 요셉이 꿈을 꿨다.

평범한 밤이었다.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형들에게 보이지 않는 주먹을 실컫 얻어맞고.
아버지한테 보이지 않는 약손으로 치유받고.

매일 똑같은 일상에 찾아온 꿈이었다.

‘밭에서 곡식 단을 묶었는데, 내 단이 일어났다. 그리고 형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 절했다.’

고대사회에서 꿈은 신적인 정보를 제공한다고 믿었다.
그냥 꿈이 아니라 반드시 일어날.... 신이 개입한 꿈이라고 생각했다.

생생하다.
아침에 일어났는데도. 너무 생생한 꿈.
달려가 형들에게 먼저 말했다.

관계를 더 엉망으로 만들 생각은 없었고,
요셉으로서 단순한 반응이었어. 그냥. 너무 생생한 이꿈을 형들에게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이 엄청난 꿈을.. 나 혼자 간직할 수는 없어.

17세 소년은. 생각보다 그리 성숙치 않다,
그는 고대사회의 그저 17세 소년일 뿐이었다.

고대 근동에 잘 알려진 아카드왕 사르곤의 꿈.이 바로 권좌에 오르는 꿈이었다.
요셉의 그것이, 사르곤의 것과 매우 비슷했다.

확인하고 싶었고
지지받고 싶었고
또.....

사랑받고 싶었다...

그러나. 잘못된 불똥이 튈 줄이야.

6절.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꾼 꿈을 들으시오
7절.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8절. 그의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의 꿈과 그의 말로 말미암아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반응이 썩 좋지 않다.




이제 그 꿈.
잊을만한 그 때.

다시 비슷한 꿈을 꾸었다.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절하는 꿈.
부인할 수 없는 이 꿈을.. 어찌하면 좋으리요.

이번엔 말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10절. 그가 그의 꿈을 아버지와 형들에게 말하매 아버지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네가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괜히 아빠한테 혼났다.

어깨죽지가 축 늘어지고..
마음이 돌덩이처럼 무거워진다.

힘 없이 터벅터벅 걸어가는 요셉을 바라보는 아버지 야곱.

11절.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




사랑하면, 간직하게 되더라.

글쎄. 오늘 짧은 본문 요셉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내게 요셉의 외로움이 새삼 느껴졌다.
그냥 지나쳐 읽을 때에는. 요셉이 잘못했네. 왜 그렇게 나서가지고 괜히 미움받고...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리고 지나친 본문.



오늘 찬찬히 다시 읽어보면서,
이 17세. 고등학교 1학년 밖에 되지 않은 이 아들이 얼마나 외로웠겠는가.
얼마나 심히 괴로웠겠는가 새삼 생각해보게 되었다.

자신과 말 섞어 놀아줄 형들이 없어.
다 같은 한 가족이라고 하면서. 나는 이야기하고 물장구 치고 놀 사람이 없어.
괜히 미움받고. 또 미움받고,
눈에 보이지 않는 주먹이 늘 요셉에게 이리저리 날아오는 그 삶이.
참.... 요셉을 요셉답게 만든 광야같은 시간이었겠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아버지가 요셉을 지극히 사랑했지만,
그것으로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이 늘 요셉에게 있었던 터.

그 때에 부어주신 하나님의 꿈은.
생명줄처럼 붙들게 된 말씀이 아니였을까?

더군다나, 형들과 아버지. 가족들에 대한 꿈이엇겠거니.
그간 보이지 않는 주먹과 발길질을 당한 요셉으로서는 나름의 통쾌?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 않았을까?

 여하튼 너무 잘났던. 아들 요셉은.. 그렇게 굳이 하지 말아야 했던 꿈 이야기를 눈치 없이 하는 바람에. (너무 순진했던 탓인지. 영리했던 탓인지 알 수 없어도)


 미움에 미움을 더하사
광야의 삶을 더 사게 된다.



나는 이 대목에서.
참 사랑에 대해서 묵상하게 되었다.

참 사랑.
은 무엇으로 끝날까?

11절.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

같은 말을 듣고 한 쪽은 시기하고,
한 쪽은 간직해 둔다.

진짜 사랑이 여기서 나타나는 것 같다.
평소에는 가려져서 잘 모르고, 거품이 잔뜩 끼어있어서. 모든 것이 다 똑같은 사랑으로 보이지만..... (그래서 속을 때도 있지만)

진짜 사랑은, 거품이 다 거둬지고 난 후에...
드러난다.



고린도서엔 이런 구절이 나온다.

 13절.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복음을 만난 자의 마음의 모습이다.
철저히 이타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내가 미쳐도 하나님 때문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임을 말하는 사도바울.

이제 자신이 온데간데 없고,
이타적인 존재가 되어진 예수가 그 안에 가득찬 증인의 모습이 생각난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될 수 있나?
절대 ‘나’외에 다른 것 생각할 수 없는. 죄된 인간에게..
심지어 사역을 하더라도 나나나. 나의 인정과 평판을 넘길 수 없는 죄된 인간에게...
어떻게 이런 마음이 나올 수 있을까.

조건없는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 사랑 때문이다.

어디서 인생이 만족을 얻을 수 있는가?
어디서가 아무 말 없이 끌어안아 품어줄 수 있는가?

예수 십자가 사랑이다.

십자가.
그래서 그 안에 진짜 엄청난 능력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