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d Testament/Exodus

출애굽기7장_하나님을 통과한 자아인식은 안식과 누림을 가져온다.

Abigail_아비가일 2021. 8. 19. 21:40

1. 모세의 의문

하나님이 뒤에서 밀어주신다고 하는데.
전혀 신바람이 나지가 않는다.

어찌..
어찌..
어찌..

거울을 보았다.
굳어진 입술을 바라본다.
그렇게 멋지게 이집트 대제국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사이를 오다니며 지시하던
그 화려한 입술이 굳어버렸다..

나는 입이 둔한 자이오니.

가장 잘났던 것이
이제는 가장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내 입..
난 입이 둔한 자..

가끔 내가 하는 말을 나도 못알아들을 때가 있다.
바보천치 같이. 어버버버. 어버버버.
목소리가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설득력 있는 목소리도 아닌 것이.

아니, 나도 못알아듣겠는데
바로가 알아듣겠냐고요.
정말 하나님. 네?네?

출6:12 모세가 여호와 앞에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도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

출 6:30 모세가 여호와 앞에서 아뢰되 나는 입이 둔한 자이오니 바로가 어찌 나의 말을 들으리이까.




2. 하나님의 대답

간단했다.

"모세. 걱정마. 너는 보게될거야.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할 거야.
형 아론이 너의 대언자가 될거야 너는 네 형 아론에게 말하고 그는 바로에게 말하는 방법이 있어. 그래서 그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보내게 할거야"

출7: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2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너는 네 형 아론에게 말하고 그는 바로에게 말하여 그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내보내게 할지니라


" 그리고 계획을 알려줄께.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게 되고 표징과 이적을 애굽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지만 바로는 말을 듣지 않을거야. 그러나 큰 심판을 통해 이스라엘자손을 인도하여 낼거야"

3절.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내 표징과 내 이적을 애굽 땅에서 많이 행할 것이나
4절.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놋ㄴ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5절.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매



그리고 그들은 보게되었다.
지팡이가 뱀이되어
지팡이가 지팡이를 삼키는 것부터 말이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2가지를 보게되었다.
모세편에서 하나님 편에서 2가지이다.

첫째는. 자아인식에 대한 부분이었다.
모세가 자신을 '입이 둔한 자' 라고 인식하듯이. 스스로에게 있는 자아인식에 대함이다.
누구에게든지 자기를 인식하는 '자아인식'이 있다.
문제는 죄된 인간 부패하여 심령이 썩어 문드러진 죄인에게 있는 자아인식은
나. 나. 나 라고 하는 자아인식이다.
이것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식 짓을 하는 자아인식으로 (엡 2:2)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한다.

출발자체가 부패한 생명에서 부터 나온 것이기에
부패한 것을 끌어당긴다.
하여, 세속적인 가치관 . 세상적인 것들. 을 자신의 기준으로 삼아놓고.
그 자아인식에 맞춰 높아지기도 했다가 낮아지기도 했다가
우울했다가 낙심했다각. 교만했다가 우월했다가
등등 울고 웃고를 반복하다가.
여기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스스로 갇혀있는 '자아인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둘째, 또 다른 자아인식이 있다.
생명으로 부터 출발된 자아인식인데 , 내 표현으로 하자면 하나님을 통과한 자아인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자가 예수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되어 하나님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자아인식이다. 그야말로 인식의 전환이 일어난 것.



오늘 모세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나를 바라보는 자아인식을 갖고 있는 듯 하다.
하나님 계획과 상관없이 나를 바라볼 때에는.
어떻게.. 어찌하여.. 이것이 나오는 것이 당연한 반응일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나님 없는 인간 모두는. 탈탈 털어봐야 아무것도 나올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를 바라봐야 하는가?
나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신 십자가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시선으로 나를 봐야한다. 하나님은 내 안에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을 보신다.
그리고 그 생명을 무한정 기뻐하신다.


하나님을 통과하지 않은 자아인식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믿음이 아니다.
즉, 교만하고 쉬이 우월해지거나
또는 우울하여 낙담하거나
결국엔 둘다 똑같다.
한결같이 '나'를 향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통과한 자아인식은
하나님의 생명을 담게된다
그것은 믿음, 순종, 안식으로 드러난다.
삶 속의 성령의 열매로 드러난다. 모양이 아닌 알곡으로 드러나.
결국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꽃을 피우게 된다.



오늘 모세에겐 이것이 필요했다.
나의 눈. 나의 방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통과한 인식의 전환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내가 좀 어떻게 되면 어떤가.
내 말이 우둔하면 어떤가.
이런 자를 쓰시겠다는데.
만약 하나님을 통과한 자아인식으로 나를 보게 된다면, 담대함이 나왔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만 이뤄지면 되. 하나님의 뜻만이야. '

그리고 그것은 '누림'으로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미리' 누리고, '계속' 누리고, '지금' 누리고, '앞으로도' 누릴.
참된 안식이다.

나한테 관심이 없으면
내 조건에 관심이 없으면 누릴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십자가의 자리에서, 가능하다. 성령께서 이 일을 행하신다.




모세야 고개를 들어라.
곧 하나님의 위엄을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