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d Testament/2 Samuel

사무엘하14장_아! 탕자가 될 수 있는 자유여! (압살롬의 7년)

Abigail_아비가일 2021. 9. 3. 16:12

아, 압살롬이여!

그대의 이름의 뜻은 '아버지는 평화이시다'라고 하였던가.

아, 압살롬이여.

아, 압살롬이여.

왜 그대는 끝끝내 아버지께서 평화이셨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가.

 


 

압살롬이 그렇게 아버지의 품을 떠나게 된 것은 실로 그술 땅으로 간 이후가 아니였다.

그의 외조부께로 도망간지 3년.

그렇다. 그는 왕가의 자손으로서 왕가의 피가 흐르는 청년으로서.

졸지에 도망자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술에서의 3년.

 

아니 압살롬은 그 훨씬 이전부터, 이미 아버지의 품을 떠나있었다.

암논을 살해했던 때로부터..

암논을 미워하는 마음을 품었던 바로 그 때로부터..

 

살인을 계획했던 2년.

그술로 도망가서의 3년은 그에게 지옥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삼하13:38 압살롬이 도망하여 그술로 가서 거기에 산 지 삼년이라

 

아버지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알았던 그는,

율법에 명시된 (민35:31) 고의로 사람을 죽인자는 반드시 처형해야 하는 율법규정을 어긴 것으로 이미 자신이 죽어야 할 자임을 .

아버지께서 반드시 자신을 죽이실 거라는 사실을.

자신은 어떻게 던지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어. 결국 죽을 수 밖에 없는 자임을 늘 인지하고 있었다.

 

'곧 죽겠구나'

'왜 아버지께서 나를 찾지 않으시지?'

'1년.. 아직도 아버지는 나를 찾지 않으신다. 화가 많이 나셨을 것이다'

'2년.. 아버지는 나를 용서하지 않으시려는 거구나'

'3년.. 나는 이제 죽을 것이다'

 

늘 지옥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그 때에, 놀라운 소식이 들려온다.

 

요압장군으로부터 날아온 소식,

아버지께서 나를 '예루살렘에 다시 귀국 하라고 하셨다'는 꿈에도 기다리던 바로 그 소식이다.

21절. 왕이 요압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허락하였으니 가서 청년 압살롬을 데려오라 하니라

 

조금 놀랍기도 했지만, 그도 잠시

다시 죽음과 같은 수렁에 빠지게 된다.


 예루살렘에서의 2년. 

 

'아버지는 나를 귀국하라고 하시고는 단 한번도 나를 찾지 않으셨고,

내 얼굴을 보지 않으셨고

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으셨고

나를 왕자로서 복귀시키시도 않으셨다.

그렇다면 나를 왜 부른 것인가?

차라리 도망자로서 거기서 살다 죽게하시지.

지금 여기에서 어쩌라는 건가? 살라는 건가? 죽으라는 건가?

율법으로 인해서 죽게 하겠다는 것인가? 아니면... 평생 고통을 당하라는 것인가?

나를 약올리시려는 것인가?'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28절. 압살롬이 이태동안 예루살렘에 있으되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이런 압살롬의 죽음과도 같은 마음은.. 예루살렘에서 요압을 대하는 모습에 아주 잘 나타나 있다.

 

32절. 압살롬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일찍이 사람을 네게 보내 너를 이리로 오라고 청한 것은 내가 너를 왕께 보내 아뢰게 하기를 '어찌하여 내가 그술에서 돌아오게 되었나이까 이 때까지 거기에 있는 것이 내게 나았으리이다' 하려 함이로라 이제는 네가 나로 하여금 왕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라.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옳으니라 하는지라

 

'차라리 그술에 있게 하지..

이렇게 고생시킬 바에... 이렇게 살인한 자로서의 .. 용서받지 못한 자로서의 삶을 살 바에야.. 나를 그저 도망자로서 있게 하시지...

차라리 죽는 것이 속편하겠다.

율법에 명시된 대로, 고의로 죽인자는 반드시 처형되어야 하는 말씀대로 차라리 죽는게 낫겠다.'

 

하는 이 지옥같은 마음..

이 지옥 같은 마음..

율법에 매인 이 지옥같은 마음...


 

이 갈등이 내게 참 안타깝게 다가오는 것은,

이 마음이 분명 내게도 동일하게 있다는 것과..

아버지 다윗의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율법으로서는 아들을 죽여야만 마땅하나, 아들이기에 사랑하기에 죽일 수 없는 다윗의 심정이.. 어찌 할 수 없는 다윗의 심정이..

죽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살릴 수도 없는.. 이 다윗의 심정..

자신이 대신 그 상황에 처하고만 싶은 다윗의 심정이..

그래서 결국 차일 피일 미루다가 7년을 미루게 된 눈물이 강같이 흐르는 다윗의 심정을..

 

그러나 그것을 한치도 알지 못하는 압살롬의 마음까지도,

나는 이 갈등상황을 - 엿보는 나도 어느새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는 듯 하다.


도저히 '자기의'에 빠진 사람으로서,' 율법'에 매인 사람으로서는 

아버지의 마음을 깨달을 수 없기에..

 

사랑을 가진 아버지로서,이 마음을 다 보일 수 없는 아버지로서는...

끝끝내 해석해 줄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다 보일 수 없기에..

그저 아들이 깨달을 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그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

 

이 갈등,

이 갈등.

이 갈등을..

 

 

한번 생각해 보았다.

압살롬이, 살인을 저지른 그 때에 아버지께 용서를 구했더라면..

혹은 그술로 가 있더라도 아버지의 용서를 믿고 돌아가 용서를 구했더라면..

아니면 예루살렘에 있는 동안에 요압을 기다리지 말고, 아버지 제가 사람을 죽였습니다. 라고 아버지께 갔더라면..

 

압살롬은 용서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글쎄, 압살롬은 왜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자신의 동생을 강간한 암논, 그 놈을 향한 분노와 미움에 대한 '정당화' 

자신이 죽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에 대한 '합리화'

이 것을 절대 굽힐 수 없는 '자신의 의로움'이 너무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기에 절대로 용서를 구할 수 없지 않았겠는가..

(압살롬은 자신의 딸 이름을 여동생과 같은 이름 '다말'이라고 짓는다. 이를 봐서라도 압살롬이 자신의 여동생 다말을 얼마나 아꼈으며...다말을 대신한 복수를 얼마나 정당화 하고 있을지를 엿볼 수 있다)

 

만약 그가..탕자와 같았더라면..

그저 다 망한 탕자와 같았더라면..

그가 자신의 의로움을 다 버리고.. 자신이 다말을 죽인 의로움을 다 버리고..

그저 살인자로서 용서를 구하는 탕자였더라면..

그저 탕자였더라면...

 

압살롬은 다윗이 베푸는 용서를 누릴 수 있지 않았을까......

 


 

압살롬은 너무 잘났었다.

너무 잘난 남자였다.

머리털이 이백세겔이나 될만큼 엄청나게 흠이 없는 남자, 크게 칭찬받는 남자.

그래서 그는 더더욱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탕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얼마든지 전복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탕자가 될 수 있는 자유함을 묵상해본다.

탕자가 된다는 것..

거지 털털이가 되어서.. 오직 아버지의 품으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바로 그 상태..

 

내가 얼마나 큰 잘못을 범했는지를 '인정'하는 바로 그 상태..

주려죽는 상황이 되었다 할지라도.. 자신이 주려죽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 상태..

그것이 아버지의 품을 떠나서 였다는 것을 인정한,

완전히 바닥이 난.. 자존심도 자기의도 모두 박살난.. 완전히 박살이 난 상태..

그 상한마음의 상태..

 

그것이 깨달아지는 놀라은 축복을 누리는 자유를..

 

왜 그렇게 미련하게 생각했던 것일까.

 


 

어느새 나는 큰 형님의 자리에 앉아서, 능력이 충만하고 너무 잘나서 누군가의 용서를 받을 필요도 없는 압살롬과 같은 자리에 있지 않았는가

그저 누군가에게 용서 받을 필요 없는, 

자신의 의로서 그저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만이 남은.

결코 아버지의 잔치를 누릴 수 없는 ..

 

그 큰 형님의 자리는

끊임없는 분노와 정죄와 판단과 미움이 터져나오는 그 지옥과 같은 마음자리이기에

결코 자유해 질 수가 없다.

아버지의 용서를 누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정'이 안되기 때문이다.

 

차라리 탕자가 낫다.

아버지의 용서와 축복을 누릴 수 있으니까.

그 축복으로 기뻐할 수 있으니까.

 

탕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이토록 자유로운 것이다.


내 안의 큰 형님과 같은 압살롬과 같은 충천한 자기의 를 봅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율법 안에서 자유를 누리려고 노력하고 최선을 다함으로 인해서 얻게된 결과는 판단과 정죄와 분노와 살인일 뿐입니다. 결국 아버지의 참된 용서를 결코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저 탕자된 동생이 미울 뿐입니다. 아, 하나님 저도 탕자와 같이 저의 죄를 인정합니다. 자기의로 인해서 결코 아버지의 용서를 누릴 수 없는 큰 형님이 아니라 차라리 탕자로서 나의 죄를 인정함으로 용서함을 받는 자로 있기를 원합니다. 압살롬이 만약 진작에 용서를 구했다면 그는 용서 받았을 텐데! 진작에 자유로웠을 텐데! 오 하나님, 저는 탕자로 있게 하소서. 나의 죄를 철저하게 인정하고 용서를 받는 , 매일 보혈로서 나를 씻기시는 그 기쁨을 누리는 자로 있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