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절. 이것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이니라.
아차차 잊을 뻔했다.
이곳은 시내산, 모세께서 하나님과 직접 교제하여 계명을 받은 바로 그 곳 시내산이다.
그러니 다시 말하자면 이 산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추억은 남다르다.
여하튼 이 곳에서 마지막 계명을 받았다.
그것은 바로 ‘십일조’에 대한 것이었다.
30절. 그리고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
다시 말하자면, 땅이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를 모두 모아 그것의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 하나님께 드리는 성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성물..
이쯤되면, 왜 10분의 일이나 하나님께 드려야 하냐는 그런 도둑놈 심보가 올라올 수 있으련만..
당시 시대상황과 주변국가가 어떠했는지를 들어보면 이런 볼멘소리가 쑥 들어갈 터.
당시는 종주권 언약이라고 하여.. 주권자가 그 성 안에 사는 백성들을 보호한다는 조건으로 백성들은 그들의 소유의 일부를 정기적으로 드려야 했는데, 그것이 너무도 터무니 없어서 까무라칠 정도였다.
9/10 십분의 구. 그리고 나머지는 그 외의 관료들에게 그리고 자신이 한 해를 농작하여 갖게 되는 것은 0.3정도 0.4정도. 이정도의 분량 뿐이었다.
그 외에도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불합리한 조항들이 넘쳐났는지..
말하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1/10이라니!! 십분의 일뿐이라니! 십분의 일이라니! 그 주변국가의 상황을 안다면..
혹은 자신들이 애굽에서 막 빠져나온 사람들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호의적인 제안인지를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들은 천하 할 것 없는 약자들이고.. 언제 어디서 외적이 침입하여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유일하게 따를 수 있고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신데 불구하고..
이 분은 무언가 더 빼앗으려고 하시는 분이 아니라.. 풀어놓아 자유케 해주시는 분임을 알 수 있었을 테다.
약자.. 나는 천하의 약자..
그런데 1/10만 바치라니..
새파랗게 노예의 기억이 떠오르는 이들에게 이러한 조건이 피부에 와닿기나 했을까?
너무 자유로워서 오히려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해 하지는 않았을까?
어찌되었든.. 십의 일조는 너무도 호의적인 제안이었다.
요즘 여러 소설을 읽고 있다. 소설은 인간상을 담아내기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악독에 저리고 저린 아주 악독한 인간인지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인간이 바로 나인 것에서도 소스라치게 놀란다.
어느 소설을 보건 동이든 서이든 강자와 약자가 존재했고 강자는 강자라는 이유로 약자를 짖밟거나 자신들을 더욱 강하게 하기 위해서 이용할 뿐이었다. 아 이쯤되면 긍휼이라는 것이 이 사람에게 베풀어졌으면 좋겠다. 제발 제발. 무색하게도 주인공은 긍휼을 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그렇게 묘사되었는데 그것을 움직이는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악한지..
죽기 직전 까지 뽑아 써먹고서는 버려버리는..
바로 약자를 향한 강자의 지당한 모습처럼 보였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라.
하나님은 유일한 강한 분이시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갈 데 없는 지독한 약자들이다. 이들은 집이 없다. 그리고 노예 출신들이다. 이들 노예 세계에서는 서로 싸우고 죽이고 빼앗고 갈취당하는 것만 있었을 것이다. 헐벗고 매맞고 정처없이 떠돌고 구걸하는 인생들을 잔뜩 모아놓고.. 유일하게 강하신 분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자유자야
너희는 이제 1/10만 내게 주어. 그것은 내게 줄 성물이야.
너희는 이렇게 나를 섬기면 되.
하면서,
가장 인격적이고
가장 자유케 하며
가장 인간을 배려한..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게 하는 이런 가장 인격적인 이런 법을 주시는 것이다.
이 분이 어떤 분이신가?
바로 이런 분이시다.
가장 인격적이고, 배려가 많으시며, 인정이 많고, 사랑이 많기로 파격적이신 분
노예에게 자유를 주시고 재산권을 주시고 섬길 수 있는 권한을 쥐어주시는 분
자신도 알지 못하는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
(이들 노예가 알았겠는가? 이들은 그저 먹을 것 입을 것만 본능적으로 바랬겠지.. 그러나 이들에게 참 자유와 인격 인류애 배려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뭐 꼭 그러라고 사정하지도 않았는데
이들에게 본인도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 가장 가장 가장 가장 필요한 것을 아주 섬세하고도 광대하게 챙겨주시는 그런 분이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 바로 예수가 있었다.
레위기를 마치면서 생각해본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분은 선하기가 이를데가 없었다.
그분은 법 하나하나에도 어떻게 하면 그들이 참 자유자 답게 참 사람답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이고도 섬세하게 말씀하셨다.
꼭 그들에게 필요한 법을 마치 아들에게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선물하듯이 하나씩 하나씩 입혀서 선물하시는 그런 하나님이셨다.
바로 내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다.
레위기 법 속에 있었던 하나님의 선하심..
그 선하심 속에 거하는 것..
그분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
그분의 하나님되심을 노래하는 것.
그분을 노래하고 즐거워하며 또 노래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내가 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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