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d Testament/Genesis

창세기39장_그리스도인의 소명의식

Abigail_아비가일 2021. 8. 18. 15:54

“어떻습니까 주인님. 싱싱한 놈들로 데려왔습니다.”

이스마엘 사람 특유의 향취가 쉬이 풍긴다.

오랜 상인의 눈썰미로 볼 때에,
 오늘은 유독 장사가 잘 될 것 같다.

게다가, 바로의 친위대장 집이라니....
수입이 좀 짭짭하겠는걸..

예상했던 대로, 도단에서 사온 그녀석이 팔렸다.
노예답지 않은 기품이 있어서 눈에 걸렸었는데,
역시 바로의 친위대장이라 그런지 보는 눈이 있으신 것 같으다.

하튼 오늘 두둑하다~ 땡잡았스~ 한잔하러 가야겠스~

1절.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1. 보디발의 집.

이상한 아이였다.
노예인데 노예근성이 없는 아이.
눈길이 자꾸 가는 이상하게 듬직한 아이였다.

'뭐야. 쟤 왜 굽신거림이 없어. 왜 저렇게 당당해. 왜 저렇게 열심히야.
왜 저렇게 기뻐. 왜 얼굴에 빛이나.'


지나가다 문득 바닥을 닦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이마에서 땀이 나는 것 조차, 그를 빛나게 해주는 것 같았다.

그 아이를 둘러싼 모든 것이. 그 아이를 돋보이게 해주었다.
심지어. 노예라는 신분마저도.

요셉..

2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사람의 집에 있으니




요셉이 가는 곳은 사람들이 몰렸다.

요셉은 일을 일찍 끝냈다.
그런데 부족함이 없었다.

언제 이 일을 다 끝냈지?
누구보다 많은 일을 금새 끝내고, 주변 사람들도 돌아보는 여유가 있었으니..
단연 요셉은 노예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았다.

굳은 일을 시키면, 결국 다 해내는 아이.
창조적으로 더 해내는 아이.

의심어린 어떤 눈빛도
감탄으로 바꾸어내는 아이.

그 아이가 요셉이었다.



‘어쩜 이런 아이가 우리 집에 들어왔을까! 나는 복도 많지!’

보디발은 멀찍이 요셉을 바라볼 때마다 그렇게 생각하곤 했다.
어느 날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아이의 힘이 아닐 것이다. 사람 에게 있을 힘이 아닐 것이다. 분명 저를 누가 돕고 있는 것일 것이다’


요셉이 가는 곳마다 풍성해지니...
가는 곳마다..
모든 시간마다.. 위엄찬 애굽의 친위대장 집에서
기쁨과 감사가 넘치니..

이것은 그의 신일 것이다.
그를 돕고 있는 신이다.

3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요셉은 결국 보디발의 신뢰를 입어,
모든 소유를 다 책임지는 총무가 되고.

하나님은 요셉을 위하여 그 위에 복을 내려주심으로.
여호와의 복이 보디발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치는 은혜를 부어주시게 된다.

5절.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6절.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훈훈한 요셉의 이야기.
어쩜 이런 복된 이야기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형통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결과적으로만 본다면,
‘형통’이라는 것이..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심으로
보디발의 모든 소유를 맡을 만큼
쫙쫙 직장에서 승진하고
일이 쫙쫙 잘풀리는 것만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어떠한 결과를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심으로...
요셉 안에 있었던 생명력 자유함 기쁨 그 안에 풍성함이.
가는 곳곳마다 흘러가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 집안에 퍼지지 않았겠는가.


요셉에게 주셨던 성실함, 용모단정함, 그가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 등이.
그 가정가운데 이슬비 옷젖는지 모르듯이 흘러가지 않았겠는가.




이 후에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 앞에서 단호히 거절했던 그의 태도를 볼 때에,
그가 하나님을 어떤 비중으로 생각했었는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태도.
그리고 그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그 집안에 향기로 번져.. 결국 복과 형통으로 드러났을 것이다.

요셉의 형통은 꽃 길을 더 아름답게 한 형통이 아니였고.
애굽의 바로 친위대장의 집 ‘노예’의 신분에서의 형통이었다.

상황과 환경의 조건이 아닌...
외부의 어떤 압력과 상관 없이, 꽃 피워진 형통의 향기였음을 보게된다.



나는 이 대목에서 신약교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 대해서이다.

세상의 압력과 권세 아래에 고개를 디밀고 들어가야 하는 신약교회들.
그런데... 거기서 숨막히는 씨름으로 시름시름하며 끝나는 것이 결론인가?

그렇지 않다.

문제의 여부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시는가? 의 형통의 여부에 달려있다.
즉, 요셉이 하나님을 높였던 태도와 마음..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크신 섭리와 언약의 약속의 말씀에 신실하심으로 그를 축복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었다.

하나님과의 사귐, 친밀함, 경외함.
그분과 동행함..
그래 거기에서 상황에 내가 눌리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뛰어넘는 형통으로 일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로 인해...
이제 신약시대가 되어,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인한 거룩한 성전이 되어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놀라운 축복의 통로가 된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나는 이런 나눔은 어떤 부분에서 납득이 되지 않는다.

새로 직장을 잡는데, 그리스도인 많은 곳으로 일부러 찾아간다는 나눔..
직장 내에 그리스도인이 없어서, 너무 아쉽다는 그런 종류의 나눔이었다.

물론 이 나눔은 ‘부르심’이라는 주제와는 다르다.
소명 따라 불러주셔서 가는 곳이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그것이 아닌, 나 편하고 남도 편하고 ... 그렇게 편한 곳을 찾아가고 싶은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라면 ... 나는 생각이 다르다.
그리스도인의 직업은 소명의식으로 인함이어야 한다. (그것이 부르심 이기도 하고.)




요셉의 이야기는 신약을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이젠 어딜가나 하나님의 임재로 가는 곳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성전된 우리..
놀라운 변화를 십자가에서 이루어주신 주님을 찬양한다!